'분노의 포도'는 작가 존스타인백이 나고자란 캘리포니아를 배경으로 대공황시절 미국 서민의 삶이 어땠는지를 그려낸 소설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존 스타인백은 '에덴의 동쪽'을 쓴 작가이기도 하다.
작가에 대해 좀 더 찾아보니, 그는 스탠포드대 생물학과에 입학했으나 공부에는 관심이 없고 문학가가 되고 싶어서 문창과 수업만 골라듣다가 결국 졸업은 못하고 중퇴를 했다. 주 회계사의 외아들로 태어나서 공부 잘 하는 엄친아로 자랐으나 성장하면서 생활고를 겪은 것 같다. 이후 뉴욕에서 생계형 신문기자가 되었는데 보도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생각을 잔뜩 녹인 사설만 써대서 해고되고 이후 막노동하는 노동자로 살아갔다. 전형적으로 머리가 비상하고 이상이 높으며 고집이 센 스타일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소설 '분노의 포도'는 그가 살면서 겪은 삶의 풍파가 직간접적으로 녹여져 있는데, 소작농이 은행에 토지를 빼앗기며 이주하지만 결국 떠돌이 신세가 된다는 내용이다. 어린 시절 유복했지만 성장하면서 점차 삶이 녹록치 않아진 그의 인생이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노동자 계급의 사회 저항에 대한 메시지도 강하게 묻어난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점은 20세기로 더스트볼 시기와 겹친다. 실제로 소설에서도 미국 중서부 지역의 농경지가 황폐화되고 있는 문제를 다룬다. 대규모 경작과 개간으로 자연적으로 있던 깊은 뿌리를 가진 초목이 제거되면서 바람이 쉽게 흩날리는 토양으로 변했고, 여기에 토양 침식과 대규모 가뭄, 거대한 먼지 폭풍이 이어지면서 작물이 말라 죽거나 뿌리채 뽑히는 일이 비재해서 정부가 사막화를 막기 위해 엄청난 투자를 했던 사건.
이 소설을 읽게 된 이유는 인터넷에서 우연히 본 아래 사진 때문이인데, 누군가 자연 초목의 깊은 뿌리와 미성숙한 농작물의 얕은 뿌리를 아이들 교육에 비교하는 글을 작성한 것을 봤다. 처음에는 농경 방식의 차이가 아니라 애초에 농산품으로 가치가 있는 상품은 뿌리가 깊지 않고 어리고 여린 개체여서 그런 게 아닐까? 라는 비판적인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늙은 고기보다는 어린 고기를, 몇년된 억센 뿔보다는 새순을 좋아하는 것이 사람이니까. 맛 때문이 아니더라도 뿌리가 깊지 않아야 수확에 유리할 것이고, 자연토양과 다르게 물이 안정적으로 공급되는 농경지 특성도 뿌리가 깊게 자라지 않는 요인 중 하나일 것이다.
세심하게 준비된 환경일 수록 자립심과 생존력이 부족할 수 있다. 잡초 같은 사람이 어딜가든 억척스럽게 잘 사는 것도 맞다. 바야흐로 대 AI 시대에 생산성을 높이는 도구가 크게 발전하면서 전통적으로 의미 있는 노동으로 여겨졌던 것들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예를 들면 예전에는 직접 했던 설거지를 이제는 식기세척기가 대신 해준다. 하지만 설거지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약하고 농땡이 피우는 사람이라고 여길 수 있을까? 만약 노동자로 계속 살아가고 싶다면 사실은 오히려 더 강도 높은 노동으로 내몰린 것일 수 있다. 시간을 번 만큼 사실은 더 고부가가치의 일을, 이전 세대보다 같은 시간 내에 더 많이 해내야 하는 운명에 처한 것이다. 그것도 과도기적 이야기이고, 기술이 더 발달하여 아주 고도의 지식과 기술을 가진 일부만이 노동을 하는 시대가 오면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노동을 할 수 없게 된다. 이 시대가 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지금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먼 미래가 아닐 수 있다.
교육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아이들이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해 쉽게 뽑히고 흔들리게 될 수 있다는 걱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통적인 관점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다음 세대의 시간을 똑같이 쏟게 하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시대에 맞는 적응 능력이 특정 분야의 전문성보다 더 생존에 유리할 것이다. 환경에 맞게 유연하게 자랄 수 있는 균형 잡힌 교육이 필요한 시점이다.
당장 50년 이상을 더 살아가야 하는 나에게도 이는 커다란 숙제인데, 나의 자녀에게는 무엇을 알려줘야 할까? 고민이 깊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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