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06
'일다운 일'이란?

지난 8월부터 지독하게 풀리지 않는 프로젝트가 하나 있다.

'잘 풀리지 않는다'는 건 기술적으로 고객의 요구사항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다른 90% 이상의 프로젝트는 별 문제 없이 잘 돌아가는데, 이번 건만큼은 특수한 사정이 있었다.


성급했던 시작

촉박한 일정 속에서 기술 검증도 안 된 상태로 물량 계약부터 해버렸다. 솔직히 난감한 상황이었다.

고객사는 보안상의 이유에서인지 초기에 요구사항을 자세히 공유하지 않았다. 그러다 물량 계약 직전에 가서야 검증 요청이 들어왔다.

검토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나는 급히 결과를 공유했고, 기술팀에서는 이 갭을 단기간에 줄일 수 없다고 보고가 올라갔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계약은 강행되었다. 당장 갈아탈 수 있는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임시방편과 그 대가

결국 임시방편(workaround)으로라도 진행하기로 했다. 문제는 고객사가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마 고객사 강행파의 논리는 이랬을 것이다.
"어떻게든 우리가 해결해볼게... 일단 진행시켜..."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해결이란, 어떻게든 우리에게 보상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약 4개월간 보기 드물게 큰 규모의 비용이 발생했고, 결국 기술적으로 해결되지 못한 이슈는 전략적인 금전 보상(financial credit)으로 무마될 기세다.


왜 해결이 불가능했나?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소프트웨어가 아닌 하드웨어에 바인딩된 이슈라서 당장 며칠 안에 해결이 불가능했다. (고객사는 당장 그 주부터 작업을 해야했다)

둘째, 프로덕트팀에게 이건 높은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셋째, 하드웨어가 개선된다 해도 이를 당장 활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생태계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왜 미리 발견하지 못했나?

고객사에게도, 우리에게도 히든 이슈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안 될 거라고 상상도 못 했다. 타 플랫폼에서는 무리 없이 돌아가던 무난한 요구사항이었으니까. 문제는 우리 플랫폼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우리 역시 국내에서 첫 사례였기 때문에 케이스 스터디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실제로 이 건보다 늦게 들어온 요청 절대 다수가 그 '특수한 요구사항'만 없다면 문제없이 잘 돌아가고 있다.

프로덕트팀으로 에스컬레이션 해보니 글로벌하게는 이미 known issue였다.


대안은 없었나?

방법은 크게 3가지였다.

1. A 플랫폼을 그대로 옮긴 다른 형태의 서비스를 사용하기
→ 비용 문제, 호환성 이슈, 물량 부족으로 탈락

2. 언젠가 우리 자체 플랫폼에서 해결될 때까지 기다리기
→ 그야말로 기약 없는 기다림. 게다가 해결되어도 또 다른 연속적인 챌린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3. 떠나기
→ 제안조차 되지 못했다.


남은 이야기

결국 이 이슈는 기술이 아닌 돈으로 마무리될 것 같다.

기술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금전적 보상으로 덮는 건 때로는 현실이고, 누군가는 이것을 '전략적 파트너십'으로 포장한다.

 


Technical Validation을 뭉갰을 때 기술 담당자의 고통

여기서부터가 나의 이야기다.

기술 담당자로서 이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는 건 굉장한 고통을 수반했다. 글로벌 팀과 협업하기 위해 새벽 미팅을 하고, 주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지원하느라 몇 주 동안 제대로 잠도 못 잤던 건 아무것도 아니다.

몸보다 마음이 괴로웠다.

보통 technical validation에서 이슈가 생기면 딜(deal)이 무산된다. 그게 정상이다. 하지만 너무나 큰 '돈'은 사람들을 마비시켰고, 일이 원칙적으로 흘러가지 못했다.


꼬리잡기의 시작

더 끔찍한 건 따로 있었다.

초기에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보상 이야기가 나오자 다들 까먹었다는 듯 꼬리잡기를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이걸 대체 누가 책임질 수 있단 말인가?

 

엄밀하게 따지면:

  • 고객사: 기술 검증 결과를 무시하고 밀어붙였으니 1차 책임
  • 영업팀: 보상을 해서라도 잡아둬야 했던 방관자

억울하게도 나는 이 말도 안 되는 프로젝트에 너무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뺏겼다. 양쪽 다 기술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나 같은 중간 번역기가 필요했다.


드러난 신호

애사심을 영끌하여 조직 차원에서 보자면, 이번 건은 꽤나 강력한 시그널이다.

우리가 follower로서 쫓아가기 급급하며, 더 이상 시장의 스탠다드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 와중에 이번 주 꽤나 시끌벅적하게 마케팅 컨퍼런스를 하며 이것저것 발표를 했다. 또 한 번 기대를 걸고 싶지만, 이미 너무 많이 얻어맞은 나는 의심과 회의감부터 든다.


일다운 일

최근 기술 조직 커뮤니케이션 채널이 통합되었다.

그 채널은 내가 입사했을 때부터 굉장히 활발했는데,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자기 PR을 하는 담벼락 역할을 했다. 어떤 느낌인지 궁금하다면 사내 링크드인 피드가 따로 있다고 상상해보라.

새로 조인한 사람들은 과거의 나처럼 압박감을 느끼고 있다.
"거기서 뭔가를 올리지 않으면 안 되는 건가요?"

자기 PR이 나쁜 건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기회다. 하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 채 변죽만 요란한 것이 나를 기운 빠지게 한다.


"일다운 일을 해보자"

위에 서술한 프로젝트의 영업 담당자는 결국 실망감을 이기지 못해 퇴사를 결정했다.

새로운 담당자가 왔고, 나에게 보상 해결을 약속하며 내년에는 '일다운 일'을 해보자고 말했다.

그게 뭘까?


Becoming > Being

최근에 꽤나 멋진 말을 들었다.

"Becoming is better than being"

  • 어떤 상태에 도달하는 것보다 계속 성장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 초기 단계에서 불편함을 감수하고 투자하는 사람과 더 좋아질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 간의 학습 곡선 격차는 갈수록 벌어질 것이다
  • AI 도구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사람은 그 조직의 최고 인재다

나의 게으름병을 낫게 하는 무서운 말이었다.

누구나 비슷하게 도구에 대한 접근권이 있고, 이제는 아이디어와 속도 싸움으로 변하고 있다.

 

그 결과를 조직에서 인정받으려면? 결국 누구보다 빠르게 만들어 불완전하더라도 홍보를 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쓰레기가 나오겠지만, 눈 감을 수 있어야 한다.

이 사회에서 성공 공식은 점점 재빠르게 홍보하여 의사결정권자에게 투자받고 한탕 해치우는 방향으로 정리되고 있다.


조직이 원하는 '일다운 일'

다시 돌아와서 조직 내에서 일다운 일의 정의를 찾아가 보자.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너무나도 분명해졌다.

조직은 '보여줄 거리'를 찾고 있다.
현실 문제를 얼마나 해결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안 될 거라고 속으로 다 답을 내렸기 때문이다.


점점 멀어지는 혁신

정말 '혁신'을 만들어내는 사람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나에게서, 우리 국가에서, 우리 조직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 당장의 이윤이 아닌 먼 미래를 위한 충분한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 딥다이브하려고 해도 가장 중요한 데이터가 우리 손에 없다
  • 그렇게 시간을 투자해서 만든 최종 결과물은 결국 나의 것으로 축적되지 않는다

선택의 기로

내가 이 롤에서 느껴왔던 딜레마는 방 속 코끼리처럼 내면 어딘가에 깊숙이 잠들어 있다가, AI 붐으로 다시 세게 다가왔다.

 

꽤나 강력한 조직 변화가 예정되었다. 단순히 리더를 자르고 사람을 이리 붙이고 저리 붙이는 수준이 아니다.

꽤 많은 사내 role의 job description이 새로 써질 것이다. 나는 곧 그 실험체가 될 예정이다.

 

Decision point

A) 눈 감고 버틸까? 조직의 비수기도 일종의 becoming으로 보고 함께 견뎌나가기
B) 탈출할 것인가? 어차피 빠르게 한탕이라면 더 사업성이 좋은 곳으로 옮기기

 

연말 회고록에서는 답이 나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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